줄리안 무어에게 생애 첫번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안겨 준 영화입니다. 감독인 리처드 글랫저는 실제로 불치병인 루게릭병을 앓았습니다. <스틸 앨리스>는 감독이 투병 중에 만든 영화입니다.

리처드 글랫저 감독은 지난 3월 10일에 타계했는데요. 줄리안 무어의 여우주연상 수상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습니다. 힘든 상황을 극복해나가며 영화에 대한 집념을 불태웠던 감독에게 깊이 고개를 숙입니다. 그의 마지막 영화를 재밌게 보기 위한 몇 가지 포인트를 짚어봤습니다.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1. 신파로 치닫지 않은 드라마

<스틸 앨리스>의 경우, 가끔 뻔한 연출을 보이기도 하지만 이전 영화들과는 조금 다릅니다. 우선 인지언어학 교수가 뇌기능을 상실하는 알츠하이머에 걸린다는 설정입니다. 그리고 유전을 통해 자녀들에게까지 이어진다는 의학적 사실도 좋은 소재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주인공이 알츠하이머를 대하는 방식입니다. 영화는 알츠하이머를 어느 날 갑자기 ‘발병’한 것으로 규정하지 않습니다. 증상을 보이다가 ‘찾아온’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낯익은 손님처럼 ‘찾아온’ 불치병을, 주인공은 혼란과 두려움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대신 단어를 외우고 메모를 하고 벽마다 포스트잇을 붙입니다. 매일 조깅하는 일상에 몇 가지 일을 ‘더한’ 것 뿐이죠. 굳이 불치병과 사활을 건 싸움은 하지 않습니다. 힘들고 고통스런 과정을 보여주지만 감동과 눈물을 쥐어짜지는 않습니다. 이 영화가 그저그런 신파로 빠지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2. 이기적이고 쿨한 가족상(像)

<스틸 앨리스>에 나오는 가족들은 좀 이상(?)합니다. 이기적이고 쿨합니다. 유전적으로 알츠하이머를 물려받았다는 딸이 앨리스에게 보이는 냉담한 반응. 의사로서 성공이 우선인 아들과 남편. 대학도 안 가고 연극에 빠져 있는 막내딸. 이들은 앨리스에게 연민과 동정은 있지만, 나의 문제로까지 나아가지 않기를 바라는 듯 합니다. 병이 점점 악화돼 가는 앨리스를 두고 질병연구소장직을 위해 타지로 떠나려는 남편, 그를 대신해 엄마를 보살피러 온 막내딸이 투덜거리는 장면은 놀라운(?) 가족관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3. 일상을 먹먹하게 연기하다

연기만으로도 반드시 봐야 하는 영화가 있습니다. <스틸 앨리스>가 그렇습니다. 상을 받아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못 받았다면, 왜 안 줬지라는 의문을 품었을만큼 줄리안 무어는 좋은 연기를 보여줍니다. ‘플랜B’를 노트북에 영상을 남기는 장면, 화장실을 찾다가 바지에 소변을 지리는 장면, 알츠하이머 환자들 앞에서 연설하는 장면, ‘플랜B’를 실행하는 장면 등등. 많은 씬들에서 확고한 존재감을 자랑합니다. 무엇보다 증상 초기부터 완전히 기억과 언어를 상실하는 시기까지, 앨리스가 조금씩 변화하는 모습을 섬세하게 표현했습니다.

개인적으로 꼽고 싶은 장면이 있는데요. 중증을 앓으면서도 막내딸에게 “그래도 대학은 가야 하지 않겠냐”며 타이르던 씬입니다. 영화 초반, 앨리스가 투병하기 전에도 막내딸에게 이렇게 말하던 씬이 있습니다. 병의 유무와 상관 없이 ‘여전히’ 엄마로서 딸에게 최선을 다하고 싶은 마음이었겠죠. 불치병도 무너뜨릴 수 없는, ‘여전히 앨리스’인 자기 존재를 증명하려는 듯이 말이지요.


● 한 줄로 말하는 영화 : 빗물처럼 스며든 앨리스라는 존재, 줄리안 무어라는 존재.

● 내 마음대로 별점 : ★★★☆





느닷없이 다가온 폭력에 대하여

70여년 가까이 지났지만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제주에 있습니다. 땅과 인간과 시간에 깊은 생채기를 낸 대학살의 역사. 영화 <비념>은 4.3 사건이라고 기록된 과거를 곱씹으며 현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반공주의 완장을 두르면서 시작된 폭력은 폭풍처럼 몰아닥칩니다. 고삐풀린 폭력은 ‘빨갱이’와 관련없는 민간인들까지 학살하기에 이르죠. 영화는 생존자들의 증언을 듣고 집단처형 장소, 집단학살이 일어난 마을을 담습니다. 죽음을 피해 일본으로 가야만 했던 생존자들도 만납니다. 무엇보다 이 영화가 가지는 미덕은, 여전히 인간의 삶을 망가뜨리는 현재의 폭력으로까지 시야를 넓히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비념>이란 제목처럼 영화는 굿판으로 시작해서 굿판으로 끝납니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을 위로하는 건 물론 지금도 끝나지 않은 폭력의 시대를 멈추고자 기원하는 비념 말이지요.




<지슬 - 아직 끝나지 않은 세월>과 <비념>

제주 4.3 사건을 소재로 한 두 편의 영화가 2012년에 제작됐습니다. 드라마와 다큐멘터리라는 장르적 차이도 있지만, 무엇보다 과거와 현재를 성찰하고 표현하는 화법이 다릅니다.

우선 <지슬 - 아직 끝나지 않은 세월>은 제의적인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학살된 민간인들의 영혼을 달래려는 익살스럽고도 경건한 굿판이라고 말할 수 있죠. 영화는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갑니다. 씻김굿 한판으로 모든 걸 잊을 수 없겠지만, 비극적 과거와 화해하기 위해 손을 내밀고 있는 겁니다. <지슬>이 보여주는 마술적 리얼리즘이 큰 울림을 주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반대로 <비념>은 4.3 사건을 현재진행형으로써 다루고 있습니다. 역사적 사실을 증언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오늘날의 사건과 엮어서 통찰하는 시각을 보여줍니다. 강정 해군기지 건설과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죠. 때문에 <지슬>과는 달리 화해를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언제까지 폭력과 비극이 계속돼야 하는 지를 묻고 있습니다. 집단학살에 대한 생존자의 목소리를 평온한 일상의 이미지들에 얹힘으로써 비극성을 극대화하는 표현력이 뛰어납니다. 




형식과 표현 사이의 까슬까슬함

<비념>은 회화적으로 연출된 이미지들이 많습니다. 추상적으로 표현된 이미지들이 사실적 영상과 어울려야 하는데, 이 부분에서 목넘김이 부드럽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4.3 사건과 강정 해군기지 건설이라는 두 문제를 통찰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의 밀도가 부족한 게 사실입니다. 다큐멘터리라는 다소 직설적인 형식과 감독이 추구했던 은유적 표현방식의 거리가 좁혀졌다면, 더 나은 <비념>을 만날 수 있었을거란 아쉬움이 드네요.



● 한 줄로 말하는 영화 : 멈추어야 할 폭력의 시대를 위해

● 내 마음대로 별점 : ★★★☆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은 유독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들이 후보에 오르거나 수상하는 경향이 많았습니다. <와일드 Wild>도 그 중 하나입니다. 상상력과 스토리텔링의 부족에 시달리는 건 헐리우드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설과 실화에 눈을 돌리는 건 당연한 일이겠죠. 현실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일들이 많습니다. 특히 영화로 옮겨지는 실화들은 주로 ‘감동’을 주는 이야기에 방점이 찍혀 있습니다. 


1. 명상과 성찰을 말하는 실화

<와일드>는 조금 다릅니다. 4,000km가 넘는 태평양 종주길에서 온갖 수난과 고행을 겪은 주인공의 이야기에서는 힐링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대자연을 대할 때의 벅차 오르는 감정도 없습니다. 산을 오르느라 헐떡거리는 카메라는 대자연을 아름답게 찍을 생각이 없기 때문이죠. 좀 거칠게 말하면, 주인공의 경험이 유별나게 특별나거나 드라마틱 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와일드>는 더 본질적이고 복잡한 무엇과 마주하게 합니다. 후회하거나 되돌아본다는 게 아닙니다. 주인공은 과거를 떠올리며 자주 욕을 내뱉기도 합니다. 주인공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새롭게 나아가는 일이죠. '나아가기 위한 멈춤’이 필요한데, 그 방법으로 택한 것이 태평양 종주입니다. 그래서 주인공에게 걷는다는 행위는 내적인 명상을 위해 멈추는 행위와 같습니다. 명상과 인생에 대한 성찰. 이 영화가 갖는 다른 힘이란 바로 이것 입니다. 


2. 플래시백과 교차편집


주인공은 태평양 종주길을 혼자 걷습니다. 힘든 일입니다. 그런데는 이유가 있죠. <와일드>는 그 연유를 플래시백(flachback)과 교차편집(cross cutting)으로 설명합니다. 현재는 시간순서대로 배열했지만, 과거는 불균형적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오래된 기억의 단편을 보듯이 말이죠. 보시면 아시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과거 사건에 대한 극적 긴장감을 위한 선택이었다고 봅니다.

아무튼 영화는 길 위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인물들을 중심으로만 이야기를 풀어나가지 않습니다. 주인공의 과거를 플래시백과 교차편집으로 보여주면서, 주인공의 내면과 그 변화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주인공의 내레이션, 겪었던 사건, 주변인물, 심리, 시점샷에 이르기까지 많은 영화적 요소들을 통해 주인공을 이해할 수 있는 여지를 줍니다. 

다만 과거 회상에서 자주 등장하는, 어머니에 대한 환상 신은 전체적인 흐름을 끊기도 합니다. 주인공의 감정변화를 보여주기 위해서라는 건 이해하겠지만, 다소 작위적으로 연출됐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3. 인생을 묻다

답보단 질문을 던지는 영화가 좋은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기준이라면 <와일드>는 분명 좋은 영화입니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은 삶이 어디 있을까요. 그럼에도 우리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야 하죠. <와일드>는 과거의 아픔과 이별하는 방법을 말하진 않습니다. 홀로 걷는 법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러고선 묻죠. 자, 이제 당신은 인생을 어떻게 걸어갈 건가요, 라고 말입니다. 

주인공처럼 태평양 종주길 위에 서야만 하는 건 아닐 겁니다. 지금부터 2시간 동안 <와일드>를 보는 일만으로도, 우리 각자가 걸어갈 방법에 대해 충분히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다시 인생을 물어볼 수 있지 않을까요.



● 한 줄로 말하는 영화 : 그물에 걸리지 않은 바람 같은 인생이 어디 있으랴.

● 내 마음대로 별점 : ★★★☆





1. 사랑 그 놈, 또 그 놈

모든 것은 사랑, 그 놈 때문입니다. 물론 사랑은 인간의 본능이자 드라마의 원천이죠. 문제는 ‘주구장창’ 사랑 뿐이라는 데 있습니다.

영화의 영어 제목은 ‘empire of lust’, 욕망의 제국 되겠습니다. 한국어 제목에서는 역설적인 의미로 ‘순수’를 넣었습니다. 영화에는 네 명의 캐릭터가 나옵니다. 사랑에 목마른 자, 복수와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는 자, 권력을 욕망하는 자, 그냥 발정난 자. 하지만 영화는 이들이 느끼는 사랑과 욕망과 발정의 차이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합니다. 나중엔 영화 스스로도 헷갈리고 있습니다. 쉬운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신파적인 사랑이죠.

때문에 캐릭터는 캐릭터대로, 이야기는 이야기대로 입체감과 깊이에서 멀어집니다. 좋은 드라마가 설계될 수 있는 공간이 있었음에도, 소위 안전빵(?)을 선택하면서 영화는 많은 아쉬움을 남깁니다. 


2. 평면적인 이야기와 캐릭터

이야기 구조와 캐릭터를 표현하는 방법은 기시감이 들 정도로 여러 영화들을 닮아 있습니다. 붉은 색과 흰 색의 대비, 칼의 직선과 춤의 곡선, 팜므파탈, 미인계 같은 극적요소들은 이미 많은 영화에서 다루었던 것들입니다. 이를 표현하는 감독의 ‘드립력’이 영화의 성패를 만듭니다. 비슷한 소재를 가지고도 감독의 표현력에 따라 <색, 계>처럼 인간의 영혼을 건드리는 영화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순수의 시대>의 경우는 관객이 예상할 수 있는 범위에서 이야기와 캐릭터가 전개됩니다. 평범하다는 말입니다. 감독의 연출력과 각본의 한계가 정점에 달하는 시퀀스가 있습니다. 권력에 대한 욕망과 사랑이 부딪히고 싸우는 결정적인 장면입니다. 절정이자 갈등이 폭발하는만큼 짜임새가 무엇보다 중요하죠. <순수의 시대>는 가장 촘촘해야 할 시퀀스에서조차 다소 의아스러운 방향으로 전개합니다. 역사는 그 자체가 스포일러라 색다른 전개를 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만큼은 역사적 사실을 어느 정도는 따라야 했다고 봅니다. 적어도 그 시퀀스를 그렇게 밋밋하게 만들거였다면 말이죠.


요즘 개봉하는 한국영화들을 보면 일종의 패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중심에는 재미없고 평범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상업적 실패를 피하려고 선택하는 관습적인 이야기 구조. 즉 이렇게 하면 망하지는 않더라, 라는 학습효과를 따르는 것이죠. 과거에는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모두 외면당하고 있습니다. 관습에 기대는 일은 한국영화의 힘을 갉아 먹고 상상력의 부재, 다양성의 상실을 가져올 것입니다.

관객은 정답을 바라지 않습니다. 논술, 구술 학원에서 배운 듯한 똑같은 수사법을 원치 않습니다. 창의적인 오답이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위플래쉬>가 카타르시스를 주는 이유는, 관객들의 생각을 ‘배반’하는 독특한 오답 때문입니다.

한국영화를 사랑하는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용기있는 상상력을 가진 한국영화를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에 사족을 붙입니다.



● 한 줄로 말하는 영화 : 인간의 욕망에 관한 물음에 내놓은 준비된 백지 답안

● 내 마음대로 별점 : ★★





1. 위로받고 싶다면

좋은 캐릭터와 이야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정받지만 외로운 자와 성공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한 자, 노력하며 인내해 온 자 그리고 희망 없이 불만에 가득찬 자. 모두 미생인 캐릭터들입니다. 각자 완생을 꿈꾸지만 그 과정에서 생채기만 남게 되는 캐릭터들이죠. 그들은 서로를 위로하고 상처를 쓰다듬어 줍니다. 영화는 추락하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우리들의 이야기이자, 날아오르기 위해 부러지듯이 날개짓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비추고 있습니다.


2. 웃고 울어라


위트있는 대사들과 영화적 표현 그리고 깊은 울림이 있습니다. 예술계를 풍자하고 비꼬는 재미도 있고, 버드맨이 날아오를 때는 묘한 카타르시스마저 느껴집니다. 무엇보다 고뇌하고 분노하는 한 인간의 모습에서, 동정과 연민을 넘어 어느 새 ‘나’와 감정적으로 동일시 할 수 있을 겁니다. 개봉 전에 김치를 비하하는 표현이 논란이 됐었는데요. 크게 신경 쓸 수준은 아닌 것 같습니다. 


3. 리듬에 맡기면 돼

우선 촬영이 리드미컬합니다. 롱테이크 원샷으로 찍은 듯이 유려하게 흘러갑니다. 엄격한 클래식 선율과 엇박을 타는 드럼의 선율이 영화 전체에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습니다. 음악만 두고 보자면, 영화는 관객과 완벽한 밀당을 합니다. 속도감 있는 드럼과 느리게 다독여주는 클래식, 스테디 캠으로 찍은 롱테이크가 함께 하면서 환상적인 리듬을 만들었습니다. 랩배틀처럼 연출된 리건(마이클 키튼)과 마이크(에드워드 노튼)의 길거리 대화 시퀀스는 영화가 가지고 있는 리듬감을 보여주는 결정적 장면입니다.


4. 환상인 듯, 환상 아닌 현실


현실과 현실적인 인물을 그려냈지만, 그 표현은 환상적으로 처리했습니다. 버드맨의 존재는 물론 가장 사실적으로 표현한 연극무대조차 꿈꾸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스크린 너머를 상상케 하는 마지막 장면은 영화의 백미입니다.


● 한 줄로 말하는 영화 : 지금 여기서 날아올라라. 춤추듯 그렇게.

● 내 마음대로 별점 : ★★★★☆


● 이 영화를 한줄로 말하면? 시작부터 끝까지 관객을 채찍질하는 하드보일드 서스펜스 '드럼'.

● 내 마음대로 별점 ★★★★

● 이 영화를 한줄로 말하면? 양심과 윤리와 진실도 함께 침몰해버린 그 날.

● 내 마음대로 별점 ★★★

● 이 영화를 한줄로 말하면? 두 눈 똑바로 뜨고 전쟁의 스코프(scope 조준경)를 봐야 하는 이유.

● 내 마음대로 별점 ★★★★


올해들어 처음으로 봤던 영화입니다. 2년 정도 된 영화인데 그 동안 볼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몇 일전 우연찮게 무료로 풀렸길래 냉큼 다운받아서 봤습니다. 네이버 N 스토어에서 선착순으로 무료 다운로드 행사를 하고 있는데요. 8편 중 이 영화를 다운받게 된 겁니다. 아래 이미지를 누르면 무료로 받을 수 있는 URL로 넘어갑니다.

그런데 맥프로를 쓰는 저로서는 PC용으로 다운받을 수가 없더군요. 해서 고육지책으로 제 아이폰에다 고화질로 다운받았습니다. 물론 네이버 TV앱을 깔아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지만요. 고화질의 용량은 1.4G입니다. 

아이폰5에서 고화질로 돌렸는데, 화질이나 자막이 깨져서 나오긴 했습니다. 그래도 뭐 2시간 동안 참고 봤습니다. 고화질이 이 정도면 일반화질이나 최소화는 안 봐도 알겠습니다.

부부는 카메라 앞에서 말다툼을 합니다. 처음엔 부인만 속사포처럼 뭐라뭐라 그러고, 남편은 '너는 짖어라'라는 식으로 먼산만 보다가 도저히 안 되겠는지 나중엔 열변을 토하게 됩니다. 저기나 여기나 부부가 말다툼을 하는 풍경은 똑같은 것 같습니다. 암튼 영화는 이런 식으로 궁금증을 유발하며 시작합니다. 이들이 왜, 무엇 때문에 싸우는지, 문제가 뭔지, 어떻게 하다가 이 지경까지 왔는지, 결론은 어떻게 될 건지 등등 말이죠. 

안 보신 분들이 계실테니 스포는 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꼭 보시라고 권유하고 싶습니다. 이야기도 이야기지만, 배우들의 미세한 감정연기나 심리묘사도 볼만하고, 무엇보다 인간이 맞딱드리는 딜레마에 대한 사유가 깊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너무나도 기묘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종교와 윤리에 관한 이야기들을 섞었는데, 어려운 말을 하면서도 절묘하고 단순하게 풀어나가는 연출도 눈여겨 볼만합니다.

위의 스틸컷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롱테이크로 부부를 비추는 가운데 엔딩크레딧이 올라옵니다. 맞은편에 서서 서로 눈도 마주치지 않는 이들은 현실에서 어떤 결말을 향하게 될까요.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영화가 이렇게 열린 결말을 맺게 된 건 어쩌면 감독이 내릴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여겨집니다.




60년대 전설적인 혁명가 체 게바라가 2000년대 초반에 부활했다. 그가 꿈꾸고 실천하던 민중혁명을 통해서가 아니었다. 한 장의 사진 덕분이었다. 티셔츠와 책 표지를 장식했고 심지어 담벼락에 그림이 그려지기도 했다. 당당하고 확신에 찬 눈빛으로 내일을 바라보는 뜨거움에 젊은이들은 열광했다. 하지만 체 게바라가 꿈꿨던 민중혁명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의 삶이나 철학과는 상관 없이, '간지'나는 사진 한 장과 혁명이라는 단어가 주는 '뜨거움'을 소비만 했기 때문이었다. 의미는 사라지고 이미지만 남는 시대, 이미지를 소비하는 시대다. 


영화 <명량>은 성웅 이순신에 의미를 부여하려 노력한다. 두려움에 떠는 인간이자, 모두의 두려움을 부둥켜 안고 죽으러 가야 하는 인간. 죽은 동료들의 환영이 보이고 구선이 불타던 그 때, 배우의 눈동자에 비치던 불길은 절망이라는 인간의 감정이었다. 전투 전에 죽을 먹으며, 승전 후엔 토란을 먹으며 느끼는 살아있음이라는 안도감 또한 인간 이순신을 보여주기 위한 극적 장치이다. 하지만 인간 이순신을 위한 감독의 고군분투는 여기까지다. 



영화는 철저히 성웅 이순신을 소비한다. 선체 내부 폭발에도 살아남고, 근접 포사격에서도 살아남는다. 심지어 폭단더미가 옆에서 터져도 영웅과 대장선은 서서히 걷히는 안개 속에서 위용을 드러낸다. 헐리우드 블록버스터나 다른 전쟁영화에서나 봤던 장면들이 반복된다. 영웅을 신격화 시키는 작업은 해전 시퀀스 내내 계속된다. 무엇보다 초라한 이순신과 화려한 왜군 장수들을 의도적으로 대비시켰다는 점이다. 최악의 환경에서 믿을 수 없는 승리를 거뒀다는 점을 암시하면서, 영웅이 지닌 비범함을 보여주는 극적장치로 사용했다. 



별다른 전략과 전술을 보여주지도 못했다. 난중일기에서조차 '천운'이라고 밖에 쓰지 못했던 미스터리를 영화는 어떻게 풀었을까. 영화를 기대한 이유이자 재미를 줄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함포사격, 백병전, 임기응변 외에 상상할 수 있는 그 이상을 보여주지 못한다.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는 '그 무엇'에 대한 의문은 영화가 끝나도 여전히 물음표를 남긴다. 영화에서 승리를 위한 전략과 전술은 바로 '그 무엇'인데, 그에 대한 설득력 있는 설명이 없는 것이다. 오히려 감독 역시 '천운'이라며 말끝을 흐리고 있다. 난전 속에서 죽은 줄 알았던 영웅과 대장선이 꿋꿋이 살아나자, "대장선이 살아있다"라며 모두 용기를 얻는다. 낭만적인 장면전환으로 얼버무리는 순간 서사는 사라지고 스타일만 남게 된다. 그렇게 의미를 잃어버린 이미지는 결국 소비되는 상품에 그친다. 



다큐멘터리처럼 찍어낸 백병전은 분명 이 영화가 가진 특유의 미덕이다. 무섭고 고통스럽고 두려워하는 인간의 표정들을 원샷, 롱테이크로 잡아낸 카메라의 힘이 대단하다. 백병전 시퀀스나 격군들의 땀에 젖은 몸을 보여주는 여러 신들에서, 영화는 영웅보다 병사와 백성에게 포커스를 맞춘다. 바다 회오리에 빨려들어가는 대장선을 구하고, 폭탄 실은 배에서 죽는 순간까지 장엄하고, 치마를 벗어 흔들며 대장선을 구하는 등 마치 영웅의 수호천사처럼 그려지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 각자의 이야기는 허술하고 빈약하기 때문에 영화의 몰입을 방해한다. <최종병기 활>의 집중력 있는 이야기 구조를 이 영화에서는 보여주지 못한 것이다. 



영화 마지막에 이순신은 '천운은 바다의 회오리가 아니라 백성'이라고 말한다. 난중일기 등을 볼 때, 이순신이 백성을 사랑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영화는 사실에 더해 신화적인 이미지를 부여하고 소비하면서 재생산하기도 했다. 영화에서 이순신이라는 영웅은 우리가 익히 아는 수준에서 그려지고 있다. 인간 이순신을 밝히는 대신 성웅 이순신에 초점을 맞추는 전략은 평범하다 못해 고루했다. 반드시 설명해야 할 지점을 은근슬쩍 넘겨버리면서 영화는 스스로 의미를 찾지 못한 채 흘러가고 말았다. 체 게바라의 사진처럼 소비할 대상으로서 이순신과 영화가 남겨진 것이다. 제목처럼 명량이라는 바다에서 벌어진 해전에만 집중했더라면, 거기서 전쟁을 수행하는 인간의 다양한 표정과 성격들을 탐구했더라면, 조금은 다른 색깔의 이순신을 만날 수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영화는 한줄기 일자진처럼 초라하고, 홀로 전쟁을 벌이는 대장선처럼 외로운 석양을 남기고 끝나고 말았다.






한 남자의 주체 되기 과정. 영화는 오랜 시간을 공들여(?), 관객에겐 엄청난 인내를 요구하며 전개된다. 스타일리시하다는 감독의 영화적 형식들도 내내 지루하다. 잔가지가 많아 영화의 핵심에 이르기 어려울 뿐 아니라 발견한다 해도 쉽게 설명하기 힘들다. 소통하지 않는 독백들이 넘쳐나는데, 이는 전적으로 정신분석적 해석을 필요로 한다.

 

민우는 상상계에 있는 어린 아이다. 자아와 타인을 구분하지 못하며, 현실과 상상 속에서 허구적 자아의 정체성을 부둥켜 안고 있다. 출판사 관계자와 설왕설래 하는 시퀀스에서 그는, 아직 실제계에 들어서지 않은 어린 아이의 행동과 사고를 보이며 '논다'.

 


영화 속 민우가 겪는 존재의 결핍은 이유 없는 구토와 불면증 등 일종의 정신병으로 나타나는데, 상상계에서 거울을 바라보며 결핍을 느끼는 아이와 맥을 같이 한다. 영화 초반 그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는 신(scene)이 유독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민우가 환상 속에서 마주하는 거리엔 '예쁜 여자'들만이 넘쳐 난다. 하지만 미니스커트를 입고 섹시한 몸매를 과시하는 익명의 그들과 함께 있을 때, 그의 구토와 정신 이상은 더 심각해진다.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결핍이 자아분열로 이어지던 와중에 '미미'를 만난다.

 


'루팽(Lupin)'이라는 술집은 민우를 상징계와 실제계로 이끄는 역할을 담당한다. 그는 그곳에서 미미를 만나지만 아무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에게 그녀는 시니피앙(기표)일 뿐이다. 그러나 동창의 결혼식에서 민우는 미미에게 '첫사랑'이라는 시니피에(기의)을 부여하고 드디어 인식하기 시작한다.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관계를 혼란스러워 하던 민우를 강제하는 것이 루팽의 바텐더다. 그는 양자의 결합(시니피앙+시니피에)을 강요하는 사회의 규칙이자 법이며, 곧 아버지라 할 수 있다.

 

상상계에서 미미는 민우의 무의식에 항상 잠재해 있었으며, 그녀가 '아버지'에 의해 강제로 그에게 의식되는 순간 소설가 민우는 '언어'를 획득하게 된다. 의사소통이 가능해진 것이다. 세상에서 내뱉은 첫번째 말인 미미를 통해 비로소 민우는 상징계를 넘어 실제계로 발을 내딛게 된다.

 


한편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진입하는 과정엔 희생이 따른다. 어린 아이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겪으면서 어머니에 대한 욕망이 아버지로 대표되는 사회적 규칙과 법으로 전환된다. 여기서 희생되는 것이 바로 모성이다. 영화에서 아내인 은혜는 모성을 상징한다. 민우가 상징계에서 언어를 얻어 소설을 써나갈 때, 그녀가 철저히 배제되는 것은 이를 방증한다.



이렇듯 영화가 '한 남자의 주체 되기 과정'을 그린다고 규정했을 때, 영화의 심각한 문제는 형식미가 아니라 캐릭터와 배우에 있다. 등장인물 모두가 그렇지만 특히 민우는 너무나 평면적이다. 민우는 수많은 독백과 방백을 펼쳐 놓는 정신분열적 캐릭터다. 당연히 그의 성향은 독특해야 하지만 적어도 성격변화엔 인과관계가 있어야 한다. 이 빈 공간은 순전히 배우의 연기가 메운다.

 

이런 복잡한 인물과 그의 내면을 풀어내기엔 강동원은 부족하다. <형사> 이후 오히려 퇴화했다는 느낌마저 들게 한다. 그리고 영화는 "'이명세'라는 브랜드는 왜 형식적 탐미주의에서 한발자국도 나아가지 않는가"라는 물음을 남긴다.


운전하면서 사이드 미러와 백 미러를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흘러가는 시간과 함께 삶도 억지로 막을 수 없지만, 사이드 미러와 백 미러로 계속 뒤를 돌아봐야 한다. 삶을 되짚어 보는 과정에서 우연치 않은 발견에 때론 웃고 눈물 짓기도 한다. 이게 산다는 것의 맛일까.




돈(빌 머레이)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살아왔다. 그렇다고 죽도록 일에 매달리는 체질은 절대 아니다. '왜 이렇게 재미없냐', '따분하고 귀찮다'는 듯, 그는 귀차니즘의 절정 고수가 지닐 수 있는 표정으로 관객을 압도(?)한다. 돈의 '만사 귀차니즘'은 한 통의 편지(그것도 분홍색!)로 조금씩 무너진다. 


 

자신에게 아들이 있다는 청천벽력할 편지에, 예전에 만났던 여자들을 한 명씩 찾아다니는 꼴은 돈의 표현대로 "쌩쑈" 다. 그걸 알면서도 그는 분홍색 편지를 보낸 여자를 찾아 나선다. 그리고 지금까지 전혀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과거의 자신을 발견한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죽은 옛 애인의 묘지에서 끝내 눈물을 보이고 마는 것이다.



'쌩쑈'를 끝마치고 돌아온 돈은 겉으론 전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아직 찾지 못한 아들에 대한 그리움과 가족이라는 따뜻함에 목말라 한다. 배낭여행 온 청년이 자신의 아들인양 먹을 것을 사다준다든지, 인생에 대한 철학을 들려준다든지 하는 행동은 그가 변했다는 걸 보여준다. 


꽃은 시들고 결국엔 죽는다. 돈의 삶도 활짝 핀 시절이 지나고, 이젠 시들어 죽음을 맞을 것이다. 늦게서야 자신과 주변의 것들을 발견하게 된 돈에게 앞으로 어떤 삶이 펼쳐질까. 결말에서 보여준 빌 머레이의 표정이 우습고도 아프다.

 

 

● 덧붙임 

영화 속에 등장하는 돈의 유일한 이웃이자 친구는 윈스턴이다. 엉뚱하고 어설픈 이 캐릭터는 자칫 무겁게 흐를 수 있는 영화를 시종일관 위트있게 이끌어준다. 무미건조한 빌 머레이의 표정 연기와 너무나도 잘 어울린다. 윈스턴이 '구워준' 음악 역시 돈의 여행을 따라가는 관객들을 지루하지 않게 한다. 왜냐고? "에티오피아 음악은 심장에 좋"으니까.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