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닷없이 다가온 폭력에 대하여

70여년 가까이 지났지만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제주에 있습니다. 땅과 인간과 시간에 깊은 생채기를 낸 대학살의 역사. 영화 <비념>은 4.3 사건이라고 기록된 과거를 곱씹으며 현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반공주의 완장을 두르면서 시작된 폭력은 폭풍처럼 몰아닥칩니다. 고삐풀린 폭력은 ‘빨갱이’와 관련없는 민간인들까지 학살하기에 이르죠. 영화는 생존자들의 증언을 듣고 집단처형 장소, 집단학살이 일어난 마을을 담습니다. 죽음을 피해 일본으로 가야만 했던 생존자들도 만납니다. 무엇보다 이 영화가 가지는 미덕은, 여전히 인간의 삶을 망가뜨리는 현재의 폭력으로까지 시야를 넓히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비념>이란 제목처럼 영화는 굿판으로 시작해서 굿판으로 끝납니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을 위로하는 건 물론 지금도 끝나지 않은 폭력의 시대를 멈추고자 기원하는 비념 말이지요.




<지슬 - 아직 끝나지 않은 세월>과 <비념>

제주 4.3 사건을 소재로 한 두 편의 영화가 2012년에 제작됐습니다. 드라마와 다큐멘터리라는 장르적 차이도 있지만, 무엇보다 과거와 현재를 성찰하고 표현하는 화법이 다릅니다.

우선 <지슬 - 아직 끝나지 않은 세월>은 제의적인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학살된 민간인들의 영혼을 달래려는 익살스럽고도 경건한 굿판이라고 말할 수 있죠. 영화는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갑니다. 씻김굿 한판으로 모든 걸 잊을 수 없겠지만, 비극적 과거와 화해하기 위해 손을 내밀고 있는 겁니다. <지슬>이 보여주는 마술적 리얼리즘이 큰 울림을 주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반대로 <비념>은 4.3 사건을 현재진행형으로써 다루고 있습니다. 역사적 사실을 증언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오늘날의 사건과 엮어서 통찰하는 시각을 보여줍니다. 강정 해군기지 건설과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죠. 때문에 <지슬>과는 달리 화해를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언제까지 폭력과 비극이 계속돼야 하는 지를 묻고 있습니다. 집단학살에 대한 생존자의 목소리를 평온한 일상의 이미지들에 얹힘으로써 비극성을 극대화하는 표현력이 뛰어납니다. 




형식과 표현 사이의 까슬까슬함

<비념>은 회화적으로 연출된 이미지들이 많습니다. 추상적으로 표현된 이미지들이 사실적 영상과 어울려야 하는데, 이 부분에서 목넘김이 부드럽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4.3 사건과 강정 해군기지 건설이라는 두 문제를 통찰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의 밀도가 부족한 게 사실입니다. 다큐멘터리라는 다소 직설적인 형식과 감독이 추구했던 은유적 표현방식의 거리가 좁혀졌다면, 더 나은 <비념>을 만날 수 있었을거란 아쉬움이 드네요.



● 한 줄로 말하는 영화 : 멈추어야 할 폭력의 시대를 위해

● 내 마음대로 별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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