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아직 님을 보내지 아니하얐습니다."

만해의 싯구절처럼 우리는 그를 아직 보내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가 어느 공연장에서 관객들과 뛰놀고 있을 것만 같습니다. 어제 뉴스를 통해 전해진 그의 느닷없는 죽음 앞에 한동안 멍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라앉지 않는 마음으로 그의 영화음악을 찾아봤습니다.


그는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에서 영화음악을 본격적으로 맡기 시작합니다. 이 영화는 시인이었던 유하 감독의 시집 제목이자 충무로 데뷔작입니다. 아이돌 같은 인기를 누리던 신해철이 넥스트를 결성한 뒤, 영화음악이라는 새로운 분야에 뛰어들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동규, 정기송 등 N.EX.T의 멤버들이 OST에 함께 했습니다.

● 푸른 비닐우산을 펴면(1993)


첫 영화음악을 만든 후 3년만에 그는 <정글 스토리>라는 음악영화의 음악감독을 맡습니다. 당시 생초짜 신인이던 윤도현이 주연을 맡았고, 김창완과 현재 YB의 멤버들(박태희, 김진원)이 출연했습니다. 이 영화의 음악 또한 N.EX.T의 멤버들이 참여하고 있는데요. 특히 김세황이 연주하는 [Main Theme from Jungle Story Part 1], 댄스곡 같은 [아주 가끔은], 신해철의 정치의식이 엿보이는 [70년대에 바침], 산울림의 곡을 일렉트로닉과 얼터너티브 사운드로 리메이크한 [내 마음은 황무지], 슬프고 서정적인 [그저 걷고 있는 거지]까지. 명곡들이 OST에 담겨 있습니다. 그 중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건 [절망에 관하여]입니다.

● 절망에 관하여(1996)


<정글 스토리>라는 영화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신해철은 이 영화의 음악감독으로서 영화음악에 대해 눈을 뜬 건 확실해보입니다. 영국 유학을 다녀온 1999년 그는, 송능한 감독의 <세기말>에 영화감독을 맡습니다. 영국 유학시절 한국말을 잊지 않으려고 <넘버3>를 외울정도로 봤다던 신해철. 그 <넘버3>의 감독 송능한이 만든 영화에 음악감독이 된거죠. 이 영화의 OST는 유학하며 배운 음악이 밑거름이 됐습니다. 국악과 크로스오버를 모색한 [Nocturne - Main Theme], 유학 후 발표한 그의 싱글인 [일상으로의 초대]와 유사한 [Bubble Love] 등이 있습니다. 신해철의 음악은 이렇게 조금씩 변해 가고 있었습니다.

● 내일로 가는 문(2000)


신해철은 <세기말>의 음악작업 이후 영화음악 그만 하겠다고 했답니다. 영화음악을 만든 사람으로서 부끄럽지 않아야 하는데, 얼마나 타당한 음악이냐고 자문했지만 확신이 안 서서였다고 합니다(씨네21, <세기말>의 영화음악, 도발의 뮤지션 신해철을 만나다). 그리고 8년이 지난 2007년, 그는 마지막이 될 영화음악 작업을 합니다. 바로 <쏜다>의 음악감독을 맡았죠. 신해철은 영화의 시나리오도 안 읽고 대략적인 줄거리만 들은 뒤에 전격적으로 작업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꿰뚫을 수 있는 음악을 만들어 내겠다"며 강한 의지를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그런만큼 <쏜다>의 OST는 도그 테이블(Dog Table), 스키조, 마이크로 키드, 뷰티풀 데이즈 등 많은 인디밴드들이 참여해 다양한 색깔의 음악으로 채웠습니다. 그런데 아쉽게 영화의 실패로 음악 또한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쏜다>의 OST 음악을 찾으려고 무진장 뒤졌는데도 못 찾았습니다. 그래서 N.EX.T가 노래한 애니메이션 <영혼기병 라젠카>의 주제곡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올립니다. 

● 해에게서 소년에게(1997)


그동안 저 그리고 우리 모두의 심장을 뜨겁게 해줘서 고맙습니다. 당신이 남겨둔 음악으로 행복하겠습니다. 그리고 아프지 않을게요. 그곳에선 편안히 쉬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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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청년들의 삶과 죽음을 통해, 두려움 그리고 그 너머에서 희망을 찾고자 합니다. 이러한 성격을 지닌 영화들은 과거에도 많이 찾을 수 있습니다. <노킹 온 헤븐스 도어 Knockin' on Heaven's Door>, <러스트 앤 본 Rust and Bone>, <50/50>  그리고 우리나라 영화인 <네버엔딩 스토리>까지. <안녕, 헤이즐>은 이러한 영화들과 같은 궤적에 있습니다. 불치병과 시한부 인생, 절망적인 상황에도 잃지 않는 유머,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성찰적인 시선, 감동적인 엔딩들 말이지요. <안녕, 헤이즐>은 이러한 관습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어 다소 진부하게 느껴지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영화가 주는 진정성과 감동은 관습을 뛰어넘어 여전히 유효합니다. 물론 그 배경을 차지하는 건 좋은 음악들입니다.


불치병 환자모임에서 우연히 만난 헤이즐과 거스는 자신들이 읽었던 책을 공유하며 급속도로 친해집니다. 전화를 기다리는 헤이즐의 표정 너머로 음악이 들립니다. 제이크 버그의  'Simple As This'입니다. 제이크 버그는 19세였던 2012년 1집 [Jake Bugg]를 발표하며 데뷔했습니다. 노엘 겔러거로부터 천재라는 평가를 받았는데요[Shangri La]로 영국의 그래미 2013 머큐리어워즈 '올해의 앨범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Simple As This'는 그의 1집에 수록된 곡입니다. 가사를 들어보면 제이크 버그는 애늙은이처럼 진지하고, 시적이고, 인생에 대한 통찰력을 선보입니다. 그래서인지 너무 빨리 죽음을 고민하게 된 영화의 주인공들과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음악입니다.

● Jake Bugg - Simple As This


책에서부터 시작된 헤이즐과 거스의 사랑은, 피터 반 후텐이라는 책의 저자를 찾아 네덜란드를 가는 데까지 이릅니다. 물론 그들의 불치병이 그걸 쉽게 허락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네덜란드에 닿은 헤이즐과 거스. 네덜란드 거리를 돌아다니며 데이트 하는 그들의 웃음과 더불어 인디언스의 'Oblivion'이 흐릅니다. 헤이즐과 거스가 처음 만났던 불치병 모임에서, 두려운 것이 뭐냐는 질문에 거스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잊혀진다는 것'. 네덜란드 데이트 씬(scene)에 쓰인 짧은 컷들은, 잊혀지는 일을 두려워한 거스와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지워지는 것도 받아들이라는 헤이즐이 함께 한 그들만의 기억입니다. 결코 '망각(Oblivion)' 되지 않을 기억말이지요. 인디언스의 노래는 그들의 기억을 축복하기 위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 Indians - Oblivion


거스는 네덜란드에서 암세포가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자기 몸에 퍼져있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미국으로 돌아온 헤이즐의 앞에 놓인 건 거스의 죽음을 준비하는 일이었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거스는 결코 쿨하지 못했지만, 끝까지 유머를 잃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자신의 장례식을 살아서 보고 싶은 거스는, 헤이즐과 친구 아이작을 교회에 불러놓고 장례식 연습을 합니다. 추도사도 듣죠. 그러고는 8일 후에 조용한 죽음을 맞습니다. 거스의 진짜 장례식에서 헤이즐은 내내 감정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러다 혼자 차를 몰고 가는 씬에서 눈물을 쏟습니다. 헤이즐의 눈물을 타고 흘러내리는 노래가 버디의 'Not About Angels'입니다. 이 곡은 버디가 영화의 편집본을 미리 보고 집에 가서 바로 썼다고 합니다. 이런 감성은 버디의 1집 [Birdy]를 들어보신 분은 익히 아실 겁니다. 1집은 그녀가 15살이었던 2012년에 발표됐습니다. 15살 맞아, 할 정도로 사랑과 외로움의 감성을 뛰어나게 표현했던 앨범입니다. 심지어 데뷔앨범은 리메이크 앨범이었습니다. 어쨌든 'Not About Angels'은 관객들에게 헤이즐의 처절하고도 슬픈 감정 그 이상을 느끼게 해줬던 노래였습니다.

● Birdy - Not About Angels


헤이즐은 작가인 피터 반 후텐이 거스의 장례식 때 전해준 편지를 두고 두고 읽습니다. 이 편지는 스포가 있어서 자세히 설명드리지 않겠습니다. 영화에서 특정음악이 두 번 쓰인 건 딱 한 번 뿐입니다. 그 음악은 프랑스 일렉트로닉 밴드 M83의 'Wait'입니다. 네덜란드에서 헤이즐과 거스가 다리를 건너는 장면에서 첫번째로, 헤이즐이 잔디밭에 누워 편지를 읽는 장면에서 두번째로 사용됩니다. M83의 음악은 <웜 바디스>, <오블리비언> 등등 최근에 많은 영화에서 쓰일 정도로 각광받고 있습니다. 'Wait'는 그들의 [Hurry Up, We're Dreaming] 앨범에 수록된 곡입니다. 몽환적이다가 후반부 갈수록 아름다워지는 M83의 음악을 통해, 거스와의 기쁜 사랑을 기억하려는 헤이즐의 슬픔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 M83 - Wait




영화는 2008년 타계한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Yves Saint Laurent)의 인생을 다루고 있습니다. 영화 내내 화려해 보이는 패션 뒤로 차분한 재즈 음악이 넘실거립니다. 영화의 음악감독을 맡은 사람은 이브라힘 말루프(Ibrahim Maalouf)입니다. 레바논에서 태어난 트럼펫 연주자로 현재 프랑스에서 활동 중입니다. 아랍음악과 전자음악을 퓨전한 재즈 음악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2013년에 자라섬재즈페스티벌에서 연주한 적도 있습니다. 그의 음악이 영화에서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첫번째 음악은 노인이 된 피에르가 이브 생 로랑을 추억하는 장면에서 사용된 음악입니다. 이브 생 로랑은 알제리 출신이지만, 인생과 패션과 사랑이 시작된 곳은 파리입니다. 배우들 이름이 자막으로 나오면서 본격적으로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데요. 이 때 함께 쓰인 음악 역시 'Paris'입니다.

● Ibrahim Maalouf - Paris


이브 생 로랑의 파리 생활은 녹록치 않았습니다. 알제리 전쟁 때 군대에 징집되었다가 약물복용으로 정신병원에 갇히기도 합니다. 결국 디오르에서 잘린 그는 동성연인이었던 피에르의 노력으로 1962년 첫 쇼를 갖게 됩니다. 자신의 이름을 건 첫번째 패션쇼는, 지금부터 이브 생 로랑의 패션과 인생이 새로운 행진(Défilé)을 시작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바로 이 시퀀스에서 나오는 음악이 'Défilé 1962'입니다. 

● Ibrahim Maalouf - Défilé 1962


매너리즘에 빠진 듯 보이던 이브 생 로랑은 스케치를 하던 어느 날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됩니다. 몬드리안 컬렉션을 창안하게 된거죠. 이 장면에서 나온 음악이 The Chambers Brothers의 'Time has come today'입니다. 여기서부터 영화 속 음악들이 차분한 무채색 재즈에서 역동적이고 다채로운 음악들, 주로 그 당시에 쓰였던 밴드음악으로 바뀝니다. 한데 피에르와 함께 바이크를 타고 여행하는 신(scene)에서 흐르던 음악만큼은 가장 최근 발표된 노래를 사용했습니다. 

● Patrick Watson - Light house


패트릭 왓슨은 캐나다 출신의 팝가수로 2006년에 [Close To Paradise]로 데뷔했는데, 실험적인 음악과 몽환적인 보컬이 매력적인 뮤지션입니다. 영화에서 그의 'Light House'가 황량한 배경과 함께 정말 잘 어울립니다. 이 외에도 영화 후반부에는 R&B 여성 트리오 The Emotions의 'Blind Alley', 신스팝 밴드 Chromatics의 'Looking For Love', 60년대 밴드 The Bossmen의 'On The Road' 등 장르를 넘나드는 음악들이 사용됩니다. 이런 다양한 색깔을 가진 음악들이 영화 속에서 이브 생 로랑의 패션과 삶의 변화를 보여줍니다.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라면 러시아 컬렉션을 구현한 마지막 시퀀스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 시퀀스에서 쓰인 음악은 오페라의 아리아입니다. 영화는 모두 세 곡의 오페라 아리아를 사용하는데요.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 중 '축배의 노래', 푸치니의 [토스카] 중에서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 그리고 카탈리니의 오페라 [왈리 La Wally] 중 '있거라, 고향 집이여'입니다. 이브 생 로랑 패션의 예술성을 표현하는 마지막 시퀀스에서 바로 마리아 칼라스가 부른 '있거라, 고향 집이여'가 사용됐습니다.

● Maria Callas - "Ebben ? ne andrò lontana" - La Wally


이브라힘 말루프는 영화 초반 겸손하고 수줍음 많은 이브 생 로랑을 표현하기 위해 스며드는 재즈음악을 사용했습니다. 후반부터는 마약, 술, 동성애에 빠진 방탕한 삶과 천재적이고 역동적인 그의 패션을 동시에 보여주려고, 실험적인 것부터 오페라까지 다양한 음악들을 선보였습니다. 영화의 감독인 자릴 레스페르는 이런 영화음악에 대해 “로맨틱하고 섬세할 뿐만 아니라 처연하고 아주 독창적이어서 이 영화에 완벽하게 어울렸다. 또 다른 예술가의 심장처럼 느껴졌다”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영화에 쓰인 음악이라서가 아니라, 영화가 음악으로 또 한번 기억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컸던 건 아니었나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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