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 감독이 연출한 15번째 장편영화입니다. 제66회 로카르노 국제영화제 감독상, 제14회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심사위원특별상을 받았습니다. 이 영화는 단순한 듯 신비로우면서도 낯설고 외롭습니다. 영화 속의 이 모든 아이러니컬한 감성을 만들고 지배하는 도구가 바로 음악입니다. 그것도 딱 한 곡의 노래입니다.


연주곡을 제외하고 영화에서 쓰이는 노래는 단 한곡 뿐입니다. 1940년대에 이난영이 발표한 것을 최은진이 최근에 다시 부른 '고향'이란 노래입니다. 이 곡은 2010년 나온 최은진의 1집 [풍각쟁이 은진]에 수록된 곡입니다. 1930년대에 유행했던 만요(漫謠)를 노래한 앨범입니다. 만요는 희화화된 노래, 코믹송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최은진은 2003년 [아리랑 소리꾼 최은진의 다시 찾은 아리랑]이란 앨범으로 데뷔했습니다. 이 앨범 또한 1930년대 기생들이 부르던 아리랑을 복원해 노래한 것입니다. 영화의 실제 촬영 장소인 카페 ‘아리랑’은 최은진이 운영하는 곳입니다. 여기서 [풍각쟁이 은진] CD를 받은 홍상수 감독은 영화에 음악을 넣어야겠다고 마음 먹었답니다. 



이 곡은 세 번의 시퀀스에서 사용됩니다. 첫번째는 오랜만에 만난 문수(이선균)와 선희(정유미)가 소주, 맥주 각 4병씩을 마시는 시퀀스입니다. 갑자기 선희가 할 일이 있다며 훌쩍 떠나버린 뒤에 이 곡이 흘러나옵니다. 노래가 가지는 묘한 아이러니와 당황, 멘붕, 정적에 쌓인 문수의 표정이 낯설지만 완벽하게 어울립니다. 두번째는 문수와 재학(정재영)이 '아리랑'이라는 카페에서 술 마시며 어색한 분위기가 계속되는 시퀀스입니다. 분명 말을 주고 받고 있지만 서로 동문서답, 선문답, 때론 개무시(?)를 하기도 합니다. 이런 삐걱대는 분위기에서 카페 주인 주현(예지원)이 '어색한 거나 깨'려고 이 노래를 틉니다. 듣고 있던 문수가 "어, 나 이 노래 낮에도 들었는데"라고 말합니다. 분명히 귀에 익은데, 이 곡이 등장했던 첫번째 시퀀스의 애매모호하고 낯선 감성은 이번 시퀀스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노래가 나오는 세번째 시퀀스는 선희와 재학이 아리랑 카페에서 술 마시는 마지막 부분입니다. 서로를 이해하는 듯 못하는 듯 이야기를 주고받던 선희와 재학은, 서로 예쁘다며 상대의 손과 얼굴을 어루만집니다. 술자리에서 이러한 행동은 에로틱한 감정으로 넘어갈 수 있었지만, 화면 너머로 '고향'이 들리면서 이런 분위기는 자연스레 깨집니다. 그 순간 선희와 재학은 약속이나 한 듯 노래가 흘러나오는 쪽을 바라봅니다.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치킨이 배달됩니다. 한동안 안 보였던 주현도 치킨왔다며 동석합니다. 에로틱은커녕 외로운 인간들만이 다시 각자 남게 될 뿐입니다. 



주인공 선희 역을 맡았던 정유미는 “<우리 선희>에 나오는 ‘고향’이란 음악을 듣고 힘이 생겼다. 평소에 듣던 노래도 아닌데 음악을 듣고 이상한 힘이 생겼다. 가사 보다 멜로디나 음악에 꽂히는데 ‘고향’은 기운이 있었다”고 말했습니다(올댓뮤직, 정유미, 무한 반복 재생하는 음악들). 영화에 쓰인 이 노래 때문에 배우뿐 아니라 영화 전체가 '이상한 힘'을 발휘합니다. 노래 자체가 가지는 힘이라기보다는 영화와 어울리면서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노래는 화면너머에서 들려오고, 배우들은 노래가 들려오는 곳으로 시선을 향하고, 영화는 이들의 변증법을 보여주며 새로운 감성을 표현합니다. 뚜렷하게 정의할 수 없는, 마법에 홀린 듯한, 결국 외로워졌지만 또 웃을 수밖에 없는, 이토록 지리멸렬한 것들 말이지요.


● 최은진 -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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