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생은 영화관에서 시작되었다

저자
시오노 나나미 지음
출판사
한길사 | 2002-08-30 출간
카테고리
예술/대중문화
책소개
고정관념을 파괴하는 역사서술로 사랑받아온 시오노 나나미의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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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노 나나미의 글은 남성적이다. 때론 마초적으로 읽히기도 한다. 그런데 그 동안의 인식을 배반하는 이런 제목이라니. 자신의 인생은 영화관에서 시작됐다는 낭만적 고백이라니. 순전히 이 책을 읽게 된 이유는 뜬금포 제목 때문이었다. 얼마지 않아 낚인 걸 알았다. 이 책의 원 제목은 <人びとのかたち>, 번역하면 '사람들 각자의 모습' 정도 되겠다. '나의 인생이 영화관에서 시작되었다'라는 번역 제목...참. 

책은 영화에 대한 에세이다. 배우에 대한 에세이다. 무엇보다 영화 속 인간 군상에 대한 이야기이다. 1990년대를 떠올리는 오늘날의 우리들처럼, 저자는 자신의 찬란했던 시절에 본 영화들에 깊은 애정을 느끼고 있다. 게리 쿠퍼, 마들렌 디트리히, 오드리 헵번, 그레타 가르보 등등 자기가 좋아했던 배우들을 영화 안팎의 시선에서 오밀조밀 따진다. 그렇다고 배우'론' 같이 전문적인 평론은 아니다. 이 책은 어쨌거나 에세이니까.

저자의 글에 대해 남성적이고 마초적이라며 앞서 개인적인 느낌을 말한 바 있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이 책에는 특이할만한 것이 있다. 저자는 어떤 영화보다도 로맨틱 드라마 같은 연애영화들을 많이 봤고, 또 많은 글을 썼다는 점이다. 이런 영화들을 다룬 글들에서 저자는 다음과 같은 감수성 예민한 표현들을 남긴다. 

"남녀를 불문하고 약간의 불안을 내포한 대사는 아름답다." - p.33

"한번도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은 남자란 여자에게 몹시 불안한 존재이다. 왜냐하면 어느 정도 선까지 억지를 부려도 될지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 p.67

통과의례까지는 아니더라도 인생의 중요한 변곡점마다 저자에게는 영화가 있었다. 저자는 영화와 영화 속 사람들과 배우, 감독들 각자의 삶을 자신만의 언어로 짚어간다. 그리고 현재를 살고 있는 저자의 일상과 연계시키며 삶의 의미를 되묻는 작업을 계속한다. 그렇게 만나는 단편들은 때론 친절하고, 때론 공감을 이끌어내며, 때론 신선한 감수성을 선사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책에는 불편한 글들도 있다. 대표적으로는 '죄와 벌'이라는 글이다. 저자는 역사적, 정치적 불순함을 슬며시 꺼내보인다. "'전쟁을 시작한 것이 과연 범죄가 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미국인들은 해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미국인들은 전쟁의 승자니까 전범의 책임을 패자에게 물을 수 있겠지만, 패자인 일본은 전쟁의 시작이 범죄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교묘하게 비틀어놨다. 최근 위안부에 대한 저자의 기고글에서 드러낸 몰역사적 인식론은 이렇듯 느닷없이 나온 게 아니다([연합뉴스] 시오노 나나미, "네덜란드 여성 위안부 동원 빨리 손써야). 

한편 저자는 책 마지막 장인 '위대한 평범'에서 이렇게 끝맺고 있다. 

 

"멀어져가는 노부부의 뒷모습을 나는 한참이나 지켜보았다. 부러웠다. '저런 행복도 맛보지 못하고 죽어야 하는가'라는 생각을 하다보니, 어딘가에 소중한 것을 버려두고 온 듯한 슬픈 기분이 들었다." - p.338

평범한 것보단 특별한 삶을 선택했던 과거의 저자는 이제 카이사르(특별함)가 아닌 게리 쿠퍼(평범함)를 갈망하는 듯이 보인다. 저자가 버려두고 온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 어디에 있을까. 평범함이 가지는 위대함과 소중함을 깨우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평범한 '사람들 각자의 모습'을 통해 나 자신을 먼저 반성하는 일이 아닐까. 



● 백은하 글, 손흥주 사진


"최민식의 얼굴은 살아 숨쉬는 지도다. 
눈 옆으로 먹물처럼 번져나간 그의 주름에는 번지수가 매겨져 있다.
긴 세월 거쳐온 연기의 흔적들이,
그의 주름 위에서 하나하나 문패를 달고 고스란히 자리잡고 있다.
그가 연기를 시작하면 문패의 주인들이 저마다 문을 열고 카메라 앞에 선다."
- [최민식: 눈물을 품은 화염방사기] p.15

영화를 감독의 예술이라고들 한다. 맞고도 틀린 말이다. 감독은 영화 전체를 이끌지만 배우는 필름 안에서 영화에 영혼을 불어넣기 때문이다. 영화에선 신내린 무당처럼 전혀 다른 사람을 되기도 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들기도 하며, 스크린을 쳐다보는 관객들을 들었다 놨다 하기도 한다. 그래서 배우는 '신비한 딴따라'다. 글쓴이는 자신만의 시각과 인터뷰와 영화 속 캐릭터 해석을 통해 배우라는 신비함에 다가가고 있다.

이 책은 10년 전인 2004년에 나왔다. 책에는 최민식, 송강호, 설경구, 전도연, 김혜수, 윤여정 등등 그때나 지금이나 대단한 '배우'들이 등장한다. 조승우, 강혜정, 박해일, 류승범처럼 자신의 필모그라피를 이제 막 단단하게 채워나가던 '배우'들도 함께 있다. 때문에 이 책은 서로 다른 맛의 '배우'와 '배우'를 버무려 전혀 새로운 맛을 담아낸 접시가 됐다. 10년이 지나도 책이 지닌 결이 여전히 살아있는 이유다. 


"누군가 그의 생김새에 대해 물어온다면 약간 남감해진다. 어떤 배우와 닮았냐고 물어봐도 딱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다. 분명 호감가고 매력적인 얼굴이지만, 입이 크다든지, 코가 오똑하다든지 하는 디테일한 생김새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미남도 추남도 아닌 그의 얼굴엔 분명한 선도, 분명한 악도 찾을 수 없다. "
- [박해일: 선과 악, 추억과 미래의 얼굴] p.134

가장 공감이 갔던 글은 박해일을 묘사한 대목이었다. 나 또한 그를 영화에서 처음 봤을 때, 선과 선 사이의 경계가 흐려진 오묘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형태를 짚을 수 없는, 그래서 어떤 방식으로도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은 무한함이었다. 

관객들에게 보여지는 것은 외모지만, 그들이 고통스러워 하는 것은 연기를 생각하는 내면이었다. 인터뷰를 통해서 고민을 서로 다르게 표현했으나 모두 똑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항상 그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 는 결론 역시 같았다. 대본을 분석하는 일도, 현장에 맞게 본능적으로 헤쳐나가는 일도, 실생활에서조차 영화 속 인물의 감정을 지니는 일도. 하나같이 연기를 향한 강인한 열정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이런 배우들도 책 속에서 스스로 겁쟁이라는 걸 고백한다. 대중들에게 버려질까 무서워하는가 하면, 대중들이 있기에 내가 있을 수 있다면서 팬들에게 최선을 다하기도 한다. 그들은 카메라 앞에 혼자 서 있는 자신이 아니라, 너머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수많은 관객들을 두려워하는 약한 존재이다. 

사람들이 못 알아볼 정도로 그 인물이 되어버리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하는 배우들. 미치도록 그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이 신비한 딴따라들나 못 알아보면 전화해 줄래요, 라고 글쓴이에게 말하던 윤여정의 사자후가 크고도 깊다. 




우리시대 한국배우

저자
백은하 지음
출판사
해나무 | 2004-08-25 출간
카테고리
예술/대중문화
책소개
이 시대 한국 영화를 이끄는 스무 명의 배우에 관한 본격 배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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