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섬세한 감성을 연기하는 부분에서 배우들의 수준이 갈린다고 생각합니다. 올해 봤던 영화 중에선 개인적으로 <한공주>의 천우희와 <거인>의 최우식이 가장 섬세한 감성으로 연기했다고 봅니다. 둘 모두 의외의 연기였습니다. 특히나 저에게는 최우식이 더욱 그랬습니다. 


최우식은 2011년 드라마 <짝패>에서 아역으로 데뷔했는데요. 드라마에서 보여준 개구쟁이 같은, 천진난만한 아역 이미지 때문이었을까요. 그 이후 맡는 역할이 일정부분 고정돼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각종 드라마에서 조연급으로 얼굴을 알리던 그가 영화를 처음 만난 건 <에튀드, 솔로(감독: 유대얼)>라는 단편에서입니다. 19분짜리 단편영화로, 2012년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서 상영된 적이 있습니다. 스크리아빈의 에튀드가 일깨우는 첫사랑에 대한 아련함이 잘 표현된 영화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이 단편에서 최우식이 보여줬던 연기는 <거인>의 전주곡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화 전체와 어우러지는 표정과 함께 감정선을 놓치지 않고 때론 그것을 리드해나간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거인>을 연출한 김태용 감독 또한 제가 느꼈던 비슷한 부분을 발견했던 것 같습니다. "2년 전 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 본 유대얼 감독님의 <에튀드, 솔로>라는 작품에서 처음 보게 된 배우였다. 당시 그 작품 속에서 여리고 순한 얼굴에 비릿하고 거친 눈매가 너무 인상적이었다"라며, 그를 캐스팅한 이유를 밝히기도 했습니다([네이버 영화매거진], 부산국제영화제 화제작 <거인>의 김태용 감독). 정작 자신은 "아직 김태용 감독님의 그 ‘비릿하다’는 표현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다. 눈을 어떻게 뜨면 그 ‘비릿한 눈’이 되는 건지"라는 반응을 보이긴 했지만요([씨네21] 최우식, <거인>).


<에튀드, 솔로> 이후 첫 장편영화에 캐스팅 되는데요. 그 유명한(?) <은밀하게 위대하게>입니다. 남파 공작원 원류환(김수현 분)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휘갈기는 고딩역할이었습니다. 자신의 잠재력을 발산할 수 있는 역할이라기보단 드라마에서 계속해왔던 명량소년 이미지의 연장선에 있는 역할입니다. 때문에 크게 눈에 띄지 않을 뿐더러 영화의 곁가지 같은 느낌에 머무르고 말았습니다. 그러던 그가 비로소 제대로 된 역할을 만나 날아오를 날개를 얻습니다. 바로 <거인>입니다. 



첫 장편영화 주연을 맡은 <거인>에서 최우식은 캐릭터 이상의 연기를 보여줍니다. 쌍커풀 없는 눈에서 뿜어내는 불안과 격정이라는 감정이 스크린을 넘어 생생하게 전달됐습니다. 때로는 야비하고 지질한 모습에 이르기까지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만드는 재능을 보여줬습니다. 특히 주인공의 클로즈업이 많은 이 영화에서 끝까지 감정선을 유지하며 극을 이끌고 가는 건 대단히 어려운 작업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카메라 안팎에서 캐릭터의 감성에 충실했기 때문에 영화 자체에 힘을 불어넣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스물 다섯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얻은 첫 주연작에서, 데뷔 이후 자기가 얼마나 차근차근 인내하며 준비해왔는지를 보여줬습니다. 배우로서의 본능을 지니고 있는지는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요. 거인의 어깨를 딛고 올라서는 진짜 '거인'이 되길 바랍니다.



● 배우 최우식의 필모그라피

1990년생

2011년 드라마 ‘짝패’로 데뷔. 드라마 '폼나게 살거야', 영화 '에튀드, 솔로'

2012년 드라마 ‘옥탑방 왕세자’, ‘특수사건 전담반 TEN’

2013년 시트콤 ‘패밀리’, ‘특수사건 전담반 TEN 2’,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

2014년 드라마 ‘운명처럼 널 사랑해’, ‘오만과 편견’, 영화 ‘거인’, '빅매치'




● 백은하 글, 손흥주 사진


"최민식의 얼굴은 살아 숨쉬는 지도다. 
눈 옆으로 먹물처럼 번져나간 그의 주름에는 번지수가 매겨져 있다.
긴 세월 거쳐온 연기의 흔적들이,
그의 주름 위에서 하나하나 문패를 달고 고스란히 자리잡고 있다.
그가 연기를 시작하면 문패의 주인들이 저마다 문을 열고 카메라 앞에 선다."
- [최민식: 눈물을 품은 화염방사기] p.15

영화를 감독의 예술이라고들 한다. 맞고도 틀린 말이다. 감독은 영화 전체를 이끌지만 배우는 필름 안에서 영화에 영혼을 불어넣기 때문이다. 영화에선 신내린 무당처럼 전혀 다른 사람을 되기도 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들기도 하며, 스크린을 쳐다보는 관객들을 들었다 놨다 하기도 한다. 그래서 배우는 '신비한 딴따라'다. 글쓴이는 자신만의 시각과 인터뷰와 영화 속 캐릭터 해석을 통해 배우라는 신비함에 다가가고 있다.

이 책은 10년 전인 2004년에 나왔다. 책에는 최민식, 송강호, 설경구, 전도연, 김혜수, 윤여정 등등 그때나 지금이나 대단한 '배우'들이 등장한다. 조승우, 강혜정, 박해일, 류승범처럼 자신의 필모그라피를 이제 막 단단하게 채워나가던 '배우'들도 함께 있다. 때문에 이 책은 서로 다른 맛의 '배우'와 '배우'를 버무려 전혀 새로운 맛을 담아낸 접시가 됐다. 10년이 지나도 책이 지닌 결이 여전히 살아있는 이유다. 


"누군가 그의 생김새에 대해 물어온다면 약간 남감해진다. 어떤 배우와 닮았냐고 물어봐도 딱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다. 분명 호감가고 매력적인 얼굴이지만, 입이 크다든지, 코가 오똑하다든지 하는 디테일한 생김새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미남도 추남도 아닌 그의 얼굴엔 분명한 선도, 분명한 악도 찾을 수 없다. "
- [박해일: 선과 악, 추억과 미래의 얼굴] p.134

가장 공감이 갔던 글은 박해일을 묘사한 대목이었다. 나 또한 그를 영화에서 처음 봤을 때, 선과 선 사이의 경계가 흐려진 오묘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형태를 짚을 수 없는, 그래서 어떤 방식으로도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은 무한함이었다. 

관객들에게 보여지는 것은 외모지만, 그들이 고통스러워 하는 것은 연기를 생각하는 내면이었다. 인터뷰를 통해서 고민을 서로 다르게 표현했으나 모두 똑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항상 그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 는 결론 역시 같았다. 대본을 분석하는 일도, 현장에 맞게 본능적으로 헤쳐나가는 일도, 실생활에서조차 영화 속 인물의 감정을 지니는 일도. 하나같이 연기를 향한 강인한 열정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이런 배우들도 책 속에서 스스로 겁쟁이라는 걸 고백한다. 대중들에게 버려질까 무서워하는가 하면, 대중들이 있기에 내가 있을 수 있다면서 팬들에게 최선을 다하기도 한다. 그들은 카메라 앞에 혼자 서 있는 자신이 아니라, 너머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수많은 관객들을 두려워하는 약한 존재이다. 

사람들이 못 알아볼 정도로 그 인물이 되어버리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하는 배우들. 미치도록 그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이 신비한 딴따라들나 못 알아보면 전화해 줄래요, 라고 글쓴이에게 말하던 윤여정의 사자후가 크고도 깊다. 




우리시대 한국배우

저자
백은하 지음
출판사
해나무 | 2004-08-25 출간
카테고리
예술/대중문화
책소개
이 시대 한국 영화를 이끄는 스무 명의 배우에 관한 본격 배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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