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리 타임즈(Three Times, 最好的時光)

- 사랑을 위한 오마주 -


△ 영화 <쓰리타임즈> 스틸컷


숨김과 드러냄으로 사랑을 말하기

초원을 달리는 말처럼 당구공은 당구대 위를 가파르게 그러나 부드럽게 내딛다가 목표했던 공에 살짝 부딪힌다. 첫사랑에 대한 수줍은 고백 같다. The Platters가 부르는 <Smoke gets in your eyes>의 유려함만큼이나 영화의 첫 롱테이크는 인상적이다. 당구공을 따라가던 카메라는 어느덧 두 남녀를 비추다가, 그들의 표정을 슬쩍 엿보는 샷으로 둘 사이의 관계를 암시한다. 시작부터 영화는 직설적인 화법을 배제했다. 능글맞게도 두 사람이 속삭이는 사랑을 은유 하는데 머물러 있다.

감독은 시종일관 소극적(?)이다. 어떤 것이 사랑인지를 하지 않는다. 관객으로 하여금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게한다. (장첸)과 메이(서기)의 관계가 시작되는 시점은 당구게임을 하면서부터였고, 편지라는 매개체를 통해 구체화된다. 인물들이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사건의 발단과 그 전개과정은 싱겁게 느껴질 정도다. 하지만 감독은 이러한 밋밋함을 풍부한 메타포와 음악으로 극복하고 있다.

특히 ()’고속도로 표지판은 인물들이 겪는 사랑의 감정이 이입된 대상들이다. 영화의 첫 부분, 각각 다른 배를 타고 있는 두 남녀가 바다 위에서 교차되는 장면이 있다. 이는 영화의 복선으로 인물들간의 관계가 엇갈릴 것임을 암시한다. 여기서 배를 타고 있는 인물들의 감정은, 첸의 경우 군입대라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 당구장 여직원에 대한 애틋함이 복합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메이는 새로운 곳에서 시작하게 될 새로운 생활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이 모순적으로 공존하고 있다.

두번째는 메이가 떠나는 장면과 첸이 메이를 찾아가는 장면에서 를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카오슝을 떠나는 메이는 첸에 대한 그리움으로 아파하는 한편, 메이를 찾아 오는 첸의 마음엔 그녀를 향한 사랑이 자리잡고 있다. ‘는 인물들이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는 감정들을 실어 나르면서 영화를 전개시키는 역할을 한다.

한편 도시명이 쓰여진 표지판은 오로지 첸의 시점에서만 그려지고 있다. 메이를 찾아가는 길에서 만난 표지판이 하나씩 지나갈 때마다, 첸은 그녀에게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고 느낄 것이다. 좁혀지는 거리만큼 메이에 대한 사랑도 깊어진다. 감독은 카메라를 첸의 시점으로 고정시켜 놓고 스쳐가는 표지판에 감정을 이입시키는 화법을 보여준다.

첫 장면을 제외하면 카메라는 큰 움직임 없이 절제되어 있으며, 배경인 당구장의 모습과 당구대를 담아낸 카메라의 구도는 상당히 안정적이다. 어떤 기교도 부리지 않는다. 첸과 메이가 다시 만난 당구장 시퀀스를 보면, 일반적으로 인물을 클로즈업함으로써 감정을 표현했을텐데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롱샷으로 처리해버렸다. 담백하고 사실적인 이러한 기법을 통해, 감독은 사랑이란 거짓 없는 솔직함이며 잔재주로 희롱하는 것이 아님을 관객에게 전달한다.

영화는 연애몽(戀愛夢), 자유몽(自由夢), 청춘몽(靑春夢)이라는 세 가지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다. 시대적 배경도 1960년대, 1910년대, 2000년대로 각각 다르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연애몽의 화법이 자유몽’, ‘청춘몽에선 영화적 형식만 달리한 채 반복된다. 숨김과 드러냄의 조화. 감독의 이러한 연출기법은 영화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것이다. <쓰리 타임즈>는 감독의 과거작들인 <밀레니엄 맘보>, <카페 뤼미에르>를 조금씩 섞어놓은 듯하다.


△ 영화 <카페 뤼미에르> 스틸컷


밀레니엄 맘보, 카페 뤼미에르, 그리고 쓰리 타임즈

허우샤오시엔의 밀레니엄 프로젝트 제1탄인 <밀레니엄 맘보>는 방황하는 청춘들을 그린 일종의 성장영화다. “청춘은 해가 뜨면 녹는 눈사람과 같다라는 대사는 영화의 주제를, 젊음의 본질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감독은 이를 극대화하기 위해 3인칭 시점으로 영화를 풀어나간다. 사건전개는 비키(서기)의 나래이션에 의존하고 있는데, 이는 감독이 직접 내러티브에 참여하지 않으면서도 그러한 효과를 가져온다. 그래서 비키의 시점=감독의 시점이라는 독특한 관계가 만들어진다. 영화는 방황하는 젊음에 바치는 오마주정도될까.

<카페 뤼미에르>는 오즈 야스지로 탄생 100주년 기념작답게, 배경은 동경이며 인물들의 일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감독은 오즈가 그랬던 것처럼 새로울 것 없는 우리의 삶을 담백하게 그려낸다. ‘다다미 미장센이라는 독특한 시점샷이나 ‘180도 법칙등 영화적 규칙을 깼던 오즈의 영화 기법이 <카페 뤼미에르>에서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등장인물과 그 인물의 인생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오즈의 화법을 차용함으로써, 허우 감독의 이 영화 또한 관찰자의 시점에서 인간의 삶을 시처럼 읊조린다.

기법적 측면에서뿐 아니라, 영화 속에 중요한 모티브로 등장하는 전철의 이미지는 도시와 현대인의 일상성을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특히 하지메(아사다 타다노부)가 그린 컴퓨터 그림은 영화 전체의 주제를 관통한다. 수많은 전철들이 원을 형성한 공간 속에 태아가 웅크리고 있는 그림이다. 여기서 전철은 탯줄을 상징하며, 그 속에서 고요히 잠든 태아는 현대인을 의미하고 있다. 인간 자신이 만든 문명으로 연결된 오늘날의 우리 삶을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메타포로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카페 뤼미에르>는 오즈에 대한 오마주라기보다 현대인의 일상에 관한 헌사에 더 가깝다. 지긋지긋하면서도 끈적하고 뜨거운 그것. 삶에 대한 것 말이다.

전작들의 연장선에서 볼 때, <쓰리 타임즈>사랑을 위한 오마주라고 정의할 수 있지 않을까. 카메라의 시점은 여전하다. 인물들의 삶에 뛰어들어서 미주알 고주알 얘기하는 게 아니라 한발짝 멀리서 관조한다. 인간의 생활과 그 주변의 것들을 탐색하고 성찰하는 감독의 작업은 이러한 카메라 안에서만 생명력을 지닌다. 그래서 오마주인 것이다. 감독이 말하는 방식은 앞선 두 작품들과 별반 차이가 없다.


△ 영화 <쓰리타임즈> 스틸컷


사랑, 그 매혹적인 쓸쓸함에 대하여

最好的時光(최호적시광).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란 뜻이다. 허우샤오시엔은 그 순간을 사랑과 오버랩시킨다. ‘아름다운 순간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사랑에 빠진현재로써의 의미는 아름다움 그 자체일 것이다. 하지만 사랑했던과거로써의 의미는 쓸쓸함이다. 지나간 사랑에 대한 슬픔과 상처는 가슴 속에 유적처럼 남는다. 치명적인 사랑의 아름다움은 쓰디 쓴 생채기를 남기는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이 사랑이라는 매혹적인 열매를 거부할 수 없는 것은 왜일까.

소설 <자기 앞의 생>에서 주인공 모모는 하밀 할아버지에게 늘 묻는다. “사람이 사랑 없이 살 수 있나요?” 감독은 중언부언하지 않고 사랑이라는 두음절에 강조점을 찍는 것으로 대신한다. 그 끝이 씁쓸하다 할지라도, <쓰리 타임즈>에서 보여준 긍정적이고 아프지 않는 일상으로서의 사랑은 사람의 주변에 항상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 그 매혹적 쓸쓸함을 의심치 않을 것이니. 그대, 나처럼 사랑을 믿으려는가.”

허우샤오시엔이 영화를 통해 하고자 했던 말은 이것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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