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 전설적인 혁명가 체 게바라가 2000년대 초반에 부활했다. 그가 꿈꾸고 실천하던 민중혁명을 통해서가 아니었다. 한 장의 사진 덕분이었다. 티셔츠와 책 표지를 장식했고 심지어 담벼락에 그림이 그려지기도 했다. 당당하고 확신에 찬 눈빛으로 내일을 바라보는 뜨거움에 젊은이들은 열광했다. 하지만 체 게바라가 꿈꿨던 민중혁명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의 삶이나 철학과는 상관 없이, '간지'나는 사진 한 장과 혁명이라는 단어가 주는 '뜨거움'을 소비만 했기 때문이었다. 의미는 사라지고 이미지만 남는 시대, 이미지를 소비하는 시대다. 


영화 <명량>은 성웅 이순신에 의미를 부여하려 노력한다. 두려움에 떠는 인간이자, 모두의 두려움을 부둥켜 안고 죽으러 가야 하는 인간. 죽은 동료들의 환영이 보이고 구선이 불타던 그 때, 배우의 눈동자에 비치던 불길은 절망이라는 인간의 감정이었다. 전투 전에 죽을 먹으며, 승전 후엔 토란을 먹으며 느끼는 살아있음이라는 안도감 또한 인간 이순신을 보여주기 위한 극적 장치이다. 하지만 인간 이순신을 위한 감독의 고군분투는 여기까지다. 



영화는 철저히 성웅 이순신을 소비한다. 선체 내부 폭발에도 살아남고, 근접 포사격에서도 살아남는다. 심지어 폭단더미가 옆에서 터져도 영웅과 대장선은 서서히 걷히는 안개 속에서 위용을 드러낸다. 헐리우드 블록버스터나 다른 전쟁영화에서나 봤던 장면들이 반복된다. 영웅을 신격화 시키는 작업은 해전 시퀀스 내내 계속된다. 무엇보다 초라한 이순신과 화려한 왜군 장수들을 의도적으로 대비시켰다는 점이다. 최악의 환경에서 믿을 수 없는 승리를 거뒀다는 점을 암시하면서, 영웅이 지닌 비범함을 보여주는 극적장치로 사용했다. 



별다른 전략과 전술을 보여주지도 못했다. 난중일기에서조차 '천운'이라고 밖에 쓰지 못했던 미스터리를 영화는 어떻게 풀었을까. 영화를 기대한 이유이자 재미를 줄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함포사격, 백병전, 임기응변 외에 상상할 수 있는 그 이상을 보여주지 못한다.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는 '그 무엇'에 대한 의문은 영화가 끝나도 여전히 물음표를 남긴다. 영화에서 승리를 위한 전략과 전술은 바로 '그 무엇'인데, 그에 대한 설득력 있는 설명이 없는 것이다. 오히려 감독 역시 '천운'이라며 말끝을 흐리고 있다. 난전 속에서 죽은 줄 알았던 영웅과 대장선이 꿋꿋이 살아나자, "대장선이 살아있다"라며 모두 용기를 얻는다. 낭만적인 장면전환으로 얼버무리는 순간 서사는 사라지고 스타일만 남게 된다. 그렇게 의미를 잃어버린 이미지는 결국 소비되는 상품에 그친다. 



다큐멘터리처럼 찍어낸 백병전은 분명 이 영화가 가진 특유의 미덕이다. 무섭고 고통스럽고 두려워하는 인간의 표정들을 원샷, 롱테이크로 잡아낸 카메라의 힘이 대단하다. 백병전 시퀀스나 격군들의 땀에 젖은 몸을 보여주는 여러 신들에서, 영화는 영웅보다 병사와 백성에게 포커스를 맞춘다. 바다 회오리에 빨려들어가는 대장선을 구하고, 폭탄 실은 배에서 죽는 순간까지 장엄하고, 치마를 벗어 흔들며 대장선을 구하는 등 마치 영웅의 수호천사처럼 그려지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 각자의 이야기는 허술하고 빈약하기 때문에 영화의 몰입을 방해한다. <최종병기 활>의 집중력 있는 이야기 구조를 이 영화에서는 보여주지 못한 것이다. 



영화 마지막에 이순신은 '천운은 바다의 회오리가 아니라 백성'이라고 말한다. 난중일기 등을 볼 때, 이순신이 백성을 사랑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영화는 사실에 더해 신화적인 이미지를 부여하고 소비하면서 재생산하기도 했다. 영화에서 이순신이라는 영웅은 우리가 익히 아는 수준에서 그려지고 있다. 인간 이순신을 밝히는 대신 성웅 이순신에 초점을 맞추는 전략은 평범하다 못해 고루했다. 반드시 설명해야 할 지점을 은근슬쩍 넘겨버리면서 영화는 스스로 의미를 찾지 못한 채 흘러가고 말았다. 체 게바라의 사진처럼 소비할 대상으로서 이순신과 영화가 남겨진 것이다. 제목처럼 명량이라는 바다에서 벌어진 해전에만 집중했더라면, 거기서 전쟁을 수행하는 인간의 다양한 표정과 성격들을 탐구했더라면, 조금은 다른 색깔의 이순신을 만날 수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영화는 한줄기 일자진처럼 초라하고, 홀로 전쟁을 벌이는 대장선처럼 외로운 석양을 남기고 끝나고 말았다.






한 남자의 주체 되기 과정. 영화는 오랜 시간을 공들여(?), 관객에겐 엄청난 인내를 요구하며 전개된다. 스타일리시하다는 감독의 영화적 형식들도 내내 지루하다. 잔가지가 많아 영화의 핵심에 이르기 어려울 뿐 아니라 발견한다 해도 쉽게 설명하기 힘들다. 소통하지 않는 독백들이 넘쳐나는데, 이는 전적으로 정신분석적 해석을 필요로 한다.

 

민우는 상상계에 있는 어린 아이다. 자아와 타인을 구분하지 못하며, 현실과 상상 속에서 허구적 자아의 정체성을 부둥켜 안고 있다. 출판사 관계자와 설왕설래 하는 시퀀스에서 그는, 아직 실제계에 들어서지 않은 어린 아이의 행동과 사고를 보이며 '논다'.

 


영화 속 민우가 겪는 존재의 결핍은 이유 없는 구토와 불면증 등 일종의 정신병으로 나타나는데, 상상계에서 거울을 바라보며 결핍을 느끼는 아이와 맥을 같이 한다. 영화 초반 그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는 신(scene)이 유독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민우가 환상 속에서 마주하는 거리엔 '예쁜 여자'들만이 넘쳐 난다. 하지만 미니스커트를 입고 섹시한 몸매를 과시하는 익명의 그들과 함께 있을 때, 그의 구토와 정신 이상은 더 심각해진다.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결핍이 자아분열로 이어지던 와중에 '미미'를 만난다.

 


'루팽(Lupin)'이라는 술집은 민우를 상징계와 실제계로 이끄는 역할을 담당한다. 그는 그곳에서 미미를 만나지만 아무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에게 그녀는 시니피앙(기표)일 뿐이다. 그러나 동창의 결혼식에서 민우는 미미에게 '첫사랑'이라는 시니피에(기의)을 부여하고 드디어 인식하기 시작한다.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관계를 혼란스러워 하던 민우를 강제하는 것이 루팽의 바텐더다. 그는 양자의 결합(시니피앙+시니피에)을 강요하는 사회의 규칙이자 법이며, 곧 아버지라 할 수 있다.

 

상상계에서 미미는 민우의 무의식에 항상 잠재해 있었으며, 그녀가 '아버지'에 의해 강제로 그에게 의식되는 순간 소설가 민우는 '언어'를 획득하게 된다. 의사소통이 가능해진 것이다. 세상에서 내뱉은 첫번째 말인 미미를 통해 비로소 민우는 상징계를 넘어 실제계로 발을 내딛게 된다.

 


한편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진입하는 과정엔 희생이 따른다. 어린 아이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겪으면서 어머니에 대한 욕망이 아버지로 대표되는 사회적 규칙과 법으로 전환된다. 여기서 희생되는 것이 바로 모성이다. 영화에서 아내인 은혜는 모성을 상징한다. 민우가 상징계에서 언어를 얻어 소설을 써나갈 때, 그녀가 철저히 배제되는 것은 이를 방증한다.



이렇듯 영화가 '한 남자의 주체 되기 과정'을 그린다고 규정했을 때, 영화의 심각한 문제는 형식미가 아니라 캐릭터와 배우에 있다. 등장인물 모두가 그렇지만 특히 민우는 너무나 평면적이다. 민우는 수많은 독백과 방백을 펼쳐 놓는 정신분열적 캐릭터다. 당연히 그의 성향은 독특해야 하지만 적어도 성격변화엔 인과관계가 있어야 한다. 이 빈 공간은 순전히 배우의 연기가 메운다.

 

이런 복잡한 인물과 그의 내면을 풀어내기엔 강동원은 부족하다. <형사> 이후 오히려 퇴화했다는 느낌마저 들게 한다. 그리고 영화는 "'이명세'라는 브랜드는 왜 형식적 탐미주의에서 한발자국도 나아가지 않는가"라는 물음을 남긴다.


운전하면서 사이드 미러와 백 미러를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흘러가는 시간과 함께 삶도 억지로 막을 수 없지만, 사이드 미러와 백 미러로 계속 뒤를 돌아봐야 한다. 삶을 되짚어 보는 과정에서 우연치 않은 발견에 때론 웃고 눈물 짓기도 한다. 이게 산다는 것의 맛일까.




돈(빌 머레이)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살아왔다. 그렇다고 죽도록 일에 매달리는 체질은 절대 아니다. '왜 이렇게 재미없냐', '따분하고 귀찮다'는 듯, 그는 귀차니즘의 절정 고수가 지닐 수 있는 표정으로 관객을 압도(?)한다. 돈의 '만사 귀차니즘'은 한 통의 편지(그것도 분홍색!)로 조금씩 무너진다. 


 

자신에게 아들이 있다는 청천벽력할 편지에, 예전에 만났던 여자들을 한 명씩 찾아다니는 꼴은 돈의 표현대로 "쌩쑈" 다. 그걸 알면서도 그는 분홍색 편지를 보낸 여자를 찾아 나선다. 그리고 지금까지 전혀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과거의 자신을 발견한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죽은 옛 애인의 묘지에서 끝내 눈물을 보이고 마는 것이다.



'쌩쑈'를 끝마치고 돌아온 돈은 겉으론 전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아직 찾지 못한 아들에 대한 그리움과 가족이라는 따뜻함에 목말라 한다. 배낭여행 온 청년이 자신의 아들인양 먹을 것을 사다준다든지, 인생에 대한 철학을 들려준다든지 하는 행동은 그가 변했다는 걸 보여준다. 


꽃은 시들고 결국엔 죽는다. 돈의 삶도 활짝 핀 시절이 지나고, 이젠 시들어 죽음을 맞을 것이다. 늦게서야 자신과 주변의 것들을 발견하게 된 돈에게 앞으로 어떤 삶이 펼쳐질까. 결말에서 보여준 빌 머레이의 표정이 우습고도 아프다.

 

 

● 덧붙임 

영화 속에 등장하는 돈의 유일한 이웃이자 친구는 윈스턴이다. 엉뚱하고 어설픈 이 캐릭터는 자칫 무겁게 흐를 수 있는 영화를 시종일관 위트있게 이끌어준다. 무미건조한 빌 머레이의 표정 연기와 너무나도 잘 어울린다. 윈스턴이 '구워준' 음악 역시 돈의 여행을 따라가는 관객들을 지루하지 않게 한다. 왜냐고? "에티오피아 음악은 심장에 좋"으니까.

쓰리 타임즈(Three Times, 最好的時光)

- 사랑을 위한 오마주 -


△ 영화 <쓰리타임즈> 스틸컷


숨김과 드러냄으로 사랑을 말하기

초원을 달리는 말처럼 당구공은 당구대 위를 가파르게 그러나 부드럽게 내딛다가 목표했던 공에 살짝 부딪힌다. 첫사랑에 대한 수줍은 고백 같다. The Platters가 부르는 <Smoke gets in your eyes>의 유려함만큼이나 영화의 첫 롱테이크는 인상적이다. 당구공을 따라가던 카메라는 어느덧 두 남녀를 비추다가, 그들의 표정을 슬쩍 엿보는 샷으로 둘 사이의 관계를 암시한다. 시작부터 영화는 직설적인 화법을 배제했다. 능글맞게도 두 사람이 속삭이는 사랑을 은유 하는데 머물러 있다.

감독은 시종일관 소극적(?)이다. 어떤 것이 사랑인지를 하지 않는다. 관객으로 하여금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게한다. (장첸)과 메이(서기)의 관계가 시작되는 시점은 당구게임을 하면서부터였고, 편지라는 매개체를 통해 구체화된다. 인물들이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사건의 발단과 그 전개과정은 싱겁게 느껴질 정도다. 하지만 감독은 이러한 밋밋함을 풍부한 메타포와 음악으로 극복하고 있다.

특히 ()’고속도로 표지판은 인물들이 겪는 사랑의 감정이 이입된 대상들이다. 영화의 첫 부분, 각각 다른 배를 타고 있는 두 남녀가 바다 위에서 교차되는 장면이 있다. 이는 영화의 복선으로 인물들간의 관계가 엇갈릴 것임을 암시한다. 여기서 배를 타고 있는 인물들의 감정은, 첸의 경우 군입대라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 당구장 여직원에 대한 애틋함이 복합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메이는 새로운 곳에서 시작하게 될 새로운 생활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이 모순적으로 공존하고 있다.

두번째는 메이가 떠나는 장면과 첸이 메이를 찾아가는 장면에서 를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카오슝을 떠나는 메이는 첸에 대한 그리움으로 아파하는 한편, 메이를 찾아 오는 첸의 마음엔 그녀를 향한 사랑이 자리잡고 있다. ‘는 인물들이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는 감정들을 실어 나르면서 영화를 전개시키는 역할을 한다.

한편 도시명이 쓰여진 표지판은 오로지 첸의 시점에서만 그려지고 있다. 메이를 찾아가는 길에서 만난 표지판이 하나씩 지나갈 때마다, 첸은 그녀에게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고 느낄 것이다. 좁혀지는 거리만큼 메이에 대한 사랑도 깊어진다. 감독은 카메라를 첸의 시점으로 고정시켜 놓고 스쳐가는 표지판에 감정을 이입시키는 화법을 보여준다.

첫 장면을 제외하면 카메라는 큰 움직임 없이 절제되어 있으며, 배경인 당구장의 모습과 당구대를 담아낸 카메라의 구도는 상당히 안정적이다. 어떤 기교도 부리지 않는다. 첸과 메이가 다시 만난 당구장 시퀀스를 보면, 일반적으로 인물을 클로즈업함으로써 감정을 표현했을텐데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롱샷으로 처리해버렸다. 담백하고 사실적인 이러한 기법을 통해, 감독은 사랑이란 거짓 없는 솔직함이며 잔재주로 희롱하는 것이 아님을 관객에게 전달한다.

영화는 연애몽(戀愛夢), 자유몽(自由夢), 청춘몽(靑春夢)이라는 세 가지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다. 시대적 배경도 1960년대, 1910년대, 2000년대로 각각 다르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연애몽의 화법이 자유몽’, ‘청춘몽에선 영화적 형식만 달리한 채 반복된다. 숨김과 드러냄의 조화. 감독의 이러한 연출기법은 영화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것이다. <쓰리 타임즈>는 감독의 과거작들인 <밀레니엄 맘보>, <카페 뤼미에르>를 조금씩 섞어놓은 듯하다.


△ 영화 <카페 뤼미에르> 스틸컷


밀레니엄 맘보, 카페 뤼미에르, 그리고 쓰리 타임즈

허우샤오시엔의 밀레니엄 프로젝트 제1탄인 <밀레니엄 맘보>는 방황하는 청춘들을 그린 일종의 성장영화다. “청춘은 해가 뜨면 녹는 눈사람과 같다라는 대사는 영화의 주제를, 젊음의 본질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감독은 이를 극대화하기 위해 3인칭 시점으로 영화를 풀어나간다. 사건전개는 비키(서기)의 나래이션에 의존하고 있는데, 이는 감독이 직접 내러티브에 참여하지 않으면서도 그러한 효과를 가져온다. 그래서 비키의 시점=감독의 시점이라는 독특한 관계가 만들어진다. 영화는 방황하는 젊음에 바치는 오마주정도될까.

<카페 뤼미에르>는 오즈 야스지로 탄생 100주년 기념작답게, 배경은 동경이며 인물들의 일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감독은 오즈가 그랬던 것처럼 새로울 것 없는 우리의 삶을 담백하게 그려낸다. ‘다다미 미장센이라는 독특한 시점샷이나 ‘180도 법칙등 영화적 규칙을 깼던 오즈의 영화 기법이 <카페 뤼미에르>에서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등장인물과 그 인물의 인생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오즈의 화법을 차용함으로써, 허우 감독의 이 영화 또한 관찰자의 시점에서 인간의 삶을 시처럼 읊조린다.

기법적 측면에서뿐 아니라, 영화 속에 중요한 모티브로 등장하는 전철의 이미지는 도시와 현대인의 일상성을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특히 하지메(아사다 타다노부)가 그린 컴퓨터 그림은 영화 전체의 주제를 관통한다. 수많은 전철들이 원을 형성한 공간 속에 태아가 웅크리고 있는 그림이다. 여기서 전철은 탯줄을 상징하며, 그 속에서 고요히 잠든 태아는 현대인을 의미하고 있다. 인간 자신이 만든 문명으로 연결된 오늘날의 우리 삶을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메타포로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카페 뤼미에르>는 오즈에 대한 오마주라기보다 현대인의 일상에 관한 헌사에 더 가깝다. 지긋지긋하면서도 끈적하고 뜨거운 그것. 삶에 대한 것 말이다.

전작들의 연장선에서 볼 때, <쓰리 타임즈>사랑을 위한 오마주라고 정의할 수 있지 않을까. 카메라의 시점은 여전하다. 인물들의 삶에 뛰어들어서 미주알 고주알 얘기하는 게 아니라 한발짝 멀리서 관조한다. 인간의 생활과 그 주변의 것들을 탐색하고 성찰하는 감독의 작업은 이러한 카메라 안에서만 생명력을 지닌다. 그래서 오마주인 것이다. 감독이 말하는 방식은 앞선 두 작품들과 별반 차이가 없다.


△ 영화 <쓰리타임즈> 스틸컷


사랑, 그 매혹적인 쓸쓸함에 대하여

最好的時光(최호적시광).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란 뜻이다. 허우샤오시엔은 그 순간을 사랑과 오버랩시킨다. ‘아름다운 순간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사랑에 빠진현재로써의 의미는 아름다움 그 자체일 것이다. 하지만 사랑했던과거로써의 의미는 쓸쓸함이다. 지나간 사랑에 대한 슬픔과 상처는 가슴 속에 유적처럼 남는다. 치명적인 사랑의 아름다움은 쓰디 쓴 생채기를 남기는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이 사랑이라는 매혹적인 열매를 거부할 수 없는 것은 왜일까.

소설 <자기 앞의 생>에서 주인공 모모는 하밀 할아버지에게 늘 묻는다. “사람이 사랑 없이 살 수 있나요?” 감독은 중언부언하지 않고 사랑이라는 두음절에 강조점을 찍는 것으로 대신한다. 그 끝이 씁쓸하다 할지라도, <쓰리 타임즈>에서 보여준 긍정적이고 아프지 않는 일상으로서의 사랑은 사람의 주변에 항상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 그 매혹적 쓸쓸함을 의심치 않을 것이니. 그대, 나처럼 사랑을 믿으려는가.”

허우샤오시엔이 영화를 통해 하고자 했던 말은 이것이 아니었을까.

 



라스 폰 트리에(Lars Von Trier)는 호불호가 명확하게 갈리는 감독입니다. <어둠 속의 댄서Dancer in the Dark> 같은 신파는 물론 <백치들The Idiots처럼실험정신 투철한 영화(?)를 만들어, 관객에게 극단적인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가 가지고 있는 스타일리시한 매력만큼은 분명합니다. 제가 처음 본 그의 영화는 <유로파Europa>였습니다. 흑백영화였지만 주인공의 손가락에서 떨어지는 피 한방울만은 붉은 색으로 처리한 장면을 보면서 범상치 않은 감독이란 걸 느꼈었습니다. 















이번에 국내에 개봉하는 <님포매니악Nymphomaniac Vol.1>은 이처럼 매니악한 감독이 만든 섹스 보고서입니다. 이미 외국에선 ‘외설이다’, ‘실제 정사다’하는 논란이 일 정도로 섹스를 묘사한 수위가 높습니다. 



하지만 잿밥이 중요하진 않습니다. 냉정하게 얘기하면 잿밥 자체는 맛이 없습니다. 주변에 뿌려지는 갖가지 향신료 덕택에 그나마 거부감 없이 넘길 수 있을 수준입니다. 선댄스 영화제 개봉 후 관객들도 섹스 장면보다는, 섹스를 문학적, 음악적, 수학적, 철학적으로 해석하는 작업이 재밌었다는 반응이 많았습니다. 밋밋한 밥에 간이 베이도록 해준 양념이 이것입니다.



감독은 이러한 양념들을 통해 염불의 본질에 다가갑니다. 섹스란 사랑의 행위라는 것, 사랑이 빠진 섹스는 ‘광(狂)’일 뿐이라는 것. 1편까지만 보았을 땐, 라스 폰 트리에가 뭔가 ‘졸라’ 평범해졌다고 생각됩니다. 말하는 방식이 순해졌달까요? <안티 크라이스트Antichrist>에서 윤리와 신화와 예술을 부정하며, 인간을 날카롭게 몰아붙이던 칼이 녹슨 느낌이 듭니다. 통속적인 결론에 이르기까지 2시간의 러닝타임이 조금 길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래도 <님포매니악> 전체를 이해하려면 2편도 봐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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